문화기행 / 중국 자금성/만리장성
역사와 혁명과 미래가 숨쉬는
거대한 중국의 얼굴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太和殿) 전경
중국의 수도 북경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그것은 이곳이 예로부터 화북 대평원과 북방의 산간지대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요충지로서 중국 역사에서 많은 나라들의 수도가 되었던 고도(古都)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춘추전국시대 연(燕)나라를 비롯해 금나라와 원나라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연경(燕京) 대도(大都) 등으로 불려져 오다가 1420년 명(明)나라의 수도가 되면서 북경(北京)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그로부터 580여 년, 북경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도읍으로서, 1949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로서 중국 역사의 중심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북경 곳곳에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과 경승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대충 살펴본다고 해도 일주일 이상은 걸린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 대표적인 곳들 가운데 시내의 자금성(紫禁城)과 천안문 광장, 만리장성의 일부인 팔달령(八達嶺) 장성을 간단히 소개한다.
궁중의상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북경시민들
• 지상에 내려앉은 황금색 지붕의 별자리 ‘자금성’
현재 고궁박물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 자금성은 북경의 얼굴과 같은 곳이다.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의 궁성이었던 이곳은 우선 그 규모부터가 엄청나게 크다. 30여만 명을 동원하여 약 15년간에 걸쳐 지었다는 궁성은 동서750m, 남북960m의 장방형으로 그 둘레가 7,236m나 되고 성안의 면적은 72만㎡가 넘는다. 거기에다 성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궁실의 수가 무려 8,700여 개나 된다고 하는데 이들 건물은 온통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기와지붕과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붉은 색의 벽돌로 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완전히 압도한다.
화려한 대리석 조각의 금수교를 건너 천안문으로 들어가면 광장처럼 생긴 대로의 좌우에 옛날의 사직단(社稷壇)이었던 중산공원과 태묘(太廟)였던 노동인민문화관이 있고, 그 끝에 자금성의 남쪽 출입문인 오문(午門)이 자리잡고 있다. 자금성은 이곳 오문에서부터 외조(外朝)인 전삼전(前三殿)과 내정(內庭)인 후삼궁(後三宮)을 거쳐 북쪽 끝의 신무문(神武門)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아홉마리의 용을 새긴 보화전 뒤쪽 계단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
벽의 두께가 36m나 된다는 거대한 오문을 들어서 바로 앞의 내금수교(內金水橋)를 건너면 태화문이 있고, 태화문을 지나면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등 전삼전이 펼쳐진다. 이 구역은 자금성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써 국가적인 행사와 의식이 행해지던 곳이다. 이들 세 궁전은 3단으로 쌓은 높직한 대리석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각 기단의 난간은 물론이고 1,142개에 이르는 배수구까지도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을 만큼 안팎 모두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공식행사에 앞서 황제가 머물던 중화전(앞쪽) 태화전 안에 보존되어 있는 황제의 화려한 보좌
이 가운데 특히 태화전은 자금성의 정전으로서 영화 <마지막 황제>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건물이다.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인 이 궁전 안에는 장엄하고 화려한 황제의 보좌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뒤쪽의 중화전은 황제가 태화전에 나오기 전 휴식을 취하거나 신하들로부터 축사(祝詞)를 받던 곳으로서 청나라 역대의 옥새(황제의 도장)가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이 중화전의 북쪽에 있는 보화전은 과거시험을 실시하거나 연말 대연회를 베풀던 곳인데, 특히 뒤쪽의 돌층계 가운데에 아홉 마리의 용을 새긴 거대한 대리석 조각과, 오른쪽 황극전 앞에 있는 구룡벽화가 유명하다..
보화전의 뒤쪽은 자금성의 내정으로서 황제가 통상의 정무를 보던 건청궁(乾淸宮), 황실의 행사장인 교태전(交泰殿), 황후의 침실이었던 곤녕궁(坤寧宮) 등 후삼궁이 있고, 황제가 결혼후 3일을 묵던 동난각(東暖閣), 황제와 황후가 노닐던 정원인 어화원(御花苑) 등, 많은 전각들이 있다.
광장을 등지고 바라본 천안문 전경
거대한 중국의 힘의 상징 ‘천안문 광장’
자금성이 옛 중국 봉건왕조의 심장부라면 천안문 광장은 현 중국인민공화국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천안문 사태로 일컬어지는 1989년의 민주화 운동으로 세계에 더욱 널리 알려진 이곳은 1919년 중국 젊은이들이 일으킨 5.4운동의 현장인 동시에 1949년 10월1일 공산혁명에 성공한 마오쩌뚱(毛澤東)이 천안문 문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수립을 정식으로 선포한 곳이다.
▲천안문 앞 분수대와 광장 동쪽의 역사박물관
현재의 천안문 광장은 1959년 건국10주년을 기념하여 주변의 도로망을 정비하고 넓이를 4배 이상 대폭 확장한 것으로 한꺼번에 50만 명 이상이 모일 수 있다고 한다. 광장의 중앙에는 높이가 38m나 되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비석의 앞면에는 마오쩌뚱의 글씨로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永垂不朽 : 인민영웅은 영원히 불멸이다)」라는 금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남쪽 끝에 있는 마오쩌뚱 기념당에는 1976년에 사망한 그의 시신이 수정관 속에 영구 안치되어 있으며, 광장의 서쪽에는 총 면적이 17만㎡나 된다는 웅장한 인민대회당이, 동쪽엔 중국혁명박물관과 역사박물관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천안문의 정중앙으로 보이는 인민영웅기념비와 마오쩌뚱 기념당
천안문 광장은 여기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외에도 자금성과 동일한 종축선상에 놓여 그 역사적 정통성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강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천안문광장은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임을 자부해온 중국의 반면적인 얼굴이 거울처럼 들여다보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천안문을 비롯해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공공건물에 줄지어 펄럭이는 오성홍기(五星紅旗)들과 광장에 넘쳐나는 무수한 인파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빚어내는 분위기가 너무도 역동적이서 조금은 두렵기까지 한 거대한 중국의 힘을 느끼게 된다.
북경에서 70㎞ 떨어진 팔달령(八達嶺)의 만리장성
•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 ‘만리장성’
인간이 만든 건축물 가운데 유일하게 달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은 실제 거리가 6,350㎞로서 이름보다 훨씬 긴 1만2,700리나 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북방의 침입을 막고자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을 징발하여 새로운 성을 쌓고 이전에 있었던 성을 연결했는데, 이것이 만리장성의 원형이다. 그후 2000여 년 동안 만리장성은 역대 황실에 의해 꾸준히 증축과 개축이 거듭되면서 동쪽 발해만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부터 서역의 실크로드 입구인 자위관(嘉谷關)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커졌다. 따라서 중국의 북방 외곽지대에서는 어디서나 장성이 보이지만 그 중에서도 장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경에서 70㎞ 떨어진 곳에 있는 팔달령(八達嶺) 장성이다.
중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 일년 내내 붐비는 팔달령 장성은 가파른 성벽들이 마치 어디쯤에서 하늘로 올라갔을 것처럼 산에서 산으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매표소 입구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의 성벽을 여판(女坂), 왼쪽의 성벽을 남판(男坂)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오른쪽의 성벽이 좀더 완만하고 왼쪽의 성벽이 좀더 가파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장성의 성벽은 평균 높이가 8.5m, 위쪽의 폭은 보통 5.7m로 말 5필이 동시에 달릴 수 있을 만큼 넓다. 그리고 성벽 위엔 300~500m 간격으로 적을 감시하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성벽을 따라 배수관은 물론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격자무늬 구멍까지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끝없이 이어진 팔달령의 장성을 따라 걷노라면 만리장성은 그 거대한 규모뿐만 아니라 성벽 하나 하나에 기울인 세심한 공력 면에서도 참으로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게 된다. songha209@empal.com
songha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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