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낭만이 공존하는 신선의 섬 남해도
문화기행 / 경남 남해도
역사와 낭만이 공존하는
신선의 섬 남해도
△하동쪽 남해도의 관문인 남해대교와 노량나루의 거북선
우리나라 남해안 섬들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남해도는 예로부터 신선의 섬(一點仙島)이라 불렸을 만큼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섬의 어느 곳을 가나 낭만과 서정이 넘쳐난다. 1973년 경남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섬의 최북단인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두 노량(露梁) 사이에 남해대교가 놓여지면서 육지와 연결된 이 섬은 2003년에 다시 경남 사천시 대방동과 남해군 창선면을 잇는 삼천포․창선대교가 놓여짐으로써 교통이 한결 편리해졌다. 따라서 해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섬을 즐겨 찾고 있는데, 남해대교가 걸쳐 있는 노량 앞 바다는 임진왜란의 종지부를 찍은 노량해전의 현장이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마친 곳이다. 또한 남쪽에 우뚝 솟아 있는 금산(錦山)은 남해안 최고의 경승지로 꼽히며, 총 연장 500리에 이르는 해안 곳곳에는 천혜의 해수욕장과 아름다운 항・포구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노도를 비롯해 섬의 곳곳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유적과 문화재가 많이 있으며, 아름답고 순박한 풍광들 속에는 오랜 세월 척박한 땅과 싸우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남해 사람들의 땀과 뜨거운 숨결이 짙게 배어 있다.
△노량대첩에서 전사한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렬사
노량해전의 현장과 충무공의 유적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자 왜군들은 철수를 시작했고, 전남 순천의 신성리에 성을 쌓고 주둔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해군제독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가며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바닷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진린은 충무공에게 왜병을 고이 보내주어야 한다고 협박하다시피 주장했으나 충무공은 진린의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설득시켜 그해 11월19일 고니시 부대를 구하기 위해 출동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와 이곳 노량 앞바다에서 임진왜란 최대의 해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충무공이 이끈 150척의조명 연합함대는 이 해전에서 왜선 500여 척을 불사르거나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고, 마침내 임진왜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충무공은 이 해전에서 손수 북채를 쥐고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쉰 넷이었다.
△이충무공의 임시 묘소였던 충렬사 경내의 빈무덤
노량 앞바다에서 싸움이 끝난 뒤 충무공의 시신은 노량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음포에 모셔졌다가 며칠 뒤 노량나루 부근 언덕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고향 아산으로 옮겨지기까지 6개월 동안 매장되어 있었는데, 남해대교를 건너 왼쪽 노량나루에 있는 충렬사(忠烈祠)는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높지막한 계단을 올라 경내의 내삼문을 들어서면 맨 앞의 비각 안에 충무공의 전적을 상세히 기록한 「유명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증시 충무 이공 묘비(有明朝鮮國 三道水軍統制使 贈諡 忠武 李公 廟碑)」로 시작되는 충렬사비가 있고, 이 비각의 뒤쪽에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빈 무덤이 하나 있다. 이 무덤이 관음포에서 숨진 충무공의 시신이 이듬해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이장될 때까지 임시로 묻혀 있던 바로 그 무덤이다.
그곳 충렬사를 나와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앞의 나루에 날렵하게 생긴 거북선 한 척이 정박해 있다. 1980년 해군사관학교가 학계 전문가들의 고증을 받아 복원했다는 이 거북선 안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선내 전투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자료들과 당시 전투장면을 재현한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관음포 첨망대에서 본 노량해전의 현장
노량나루에서 올라와 다시 남해읍 방향으로 3.2km쯤 가면 이락사(李落祠)가 있는데, 이곳은 관음포의 함상에서 숨을 거둔 충무공의 시신을 맨 처음 육지에 안치했던 곳이다.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의 「대성운해(大星殞海)」라는 현액이 걸려 있는 전각 안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고, 그 뒤쪽의 솔밭 길을 따라가면 누각이 한 채 있다. 첨망대라 부르는 이 누각에 오르면 400여 년 전 수백 척의 왜선들을 불태우고 격침시켰던 노량해전의 현장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멀리 광양제철소가 건너다보인다.
‘남해의 소금강’ 금산과 보리암
남해 최고의 경승지 금산(해발701m)은 이락사에서 약 28km 남쪽 이동면에 있다. 19번 도로를 따라 남해읍과 이동면 소재지를 지나면 앵강곡 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에서 상주 쪽으로 800m쯤 더 가면 왼쪽에 금산 보리암 입구 복곡제1주차장 매표소로 가는 진입로가 나온다. 매표소에 도착해 산 위의 제2주차장까지 왕복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면 정상아래 보리암까지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다.
△ 「남해의 소금강」금산의 보리암과 해수관음상
본래 금산의 이름은 보광산(普光山)이었다고 한다. 산의 정상 밑에 있는 보리암(菩提庵)은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로서 보광사라 했고, 산의 이름도 이를 따서 보광산이라 불렀는데, 이 산의 이름이 「비단산」이란 뜻의 금산(錦山)으로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 천운의 뜻을 품고 백두산에 들어갔다. 하지만 산신이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성계는 두 번째로 지리산에 들어갔으나 그곳 산신 역시 받아주지 않았다. 명산을 찾아다니던 이성계는 마침내 이곳 남해도의 보광산에 들어와서야 백일기도를 올릴 수 있었고, 비로소 왕조창업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보광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주고자 했지만 그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한 신하가 『비단으로 산을 감싸기엔 나라 살림이 허락지 않고, 영원한 기념도 될 수 없으니 차라리 산 이름을 비단산(錦山)으로 지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안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며 산 이름을 금산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그 은혜를 갚았다고 한다. 그리고 보광암도 조선 현종원년(1660)에 이르러 왕실의 원당이 되면서 보리암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보리암의 3층석탑
「금산38경」으로 일컬어지는 명소의 대부분이 보리암 주변에 흩어져 있는데, 먼저 암자의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금산의 정상인 대장봉에 오르면 눈에 띄게 커다란 바위에 「홍문을 지나 금산에 오르다.」라는 뜻의 「由虹門 上錦山」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였던 주세붕이 썼다고 하며, 그런 까닭으로 그 바위 이름도 문장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문장암 앞에 우리나라 최남단의 봉수대였던 망대가 있는데, 그 위에 서면 호쾌하기 이를 데 없는 금산의 절경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산자락과 능선에는 조물주가 마음먹고 새겨놓은 듯한 기암괴석과 암봉들이 금방이라도 인간세계를 향해 뛰어내릴 듯 아슬아슬하고, 크고 작은 섬들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떠있는 다도해의 쪽빛 바다는 너무도 푸르러서 눈이 부시다.
△쌍홍문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의 절경
정상에서 다시 보리암으로 내려와 탑대에 서면 양양 낙산사, 강화 낙가사의 관음상과 함께 우리나라 3대해수관음상으로 꼽힐 만큼 치성을 드리면 영험하다는 커다란 관음보살상이 남해바다를 굽어보며 서있고. 고려시대의 불상 뒤의 능선엔 웅장한 대장암을 시작으로 형리암 능주암 화엄봉 일월봉 좌선대 상사바위 등이 호위하듯 줄지어 서있다. 그리고 탑대 주변엔 천구암과 가사굴이, 보리암의 왼쪽 아래엔 이태조기단과 천계암 삼불암 등이, 오른쪽 아래엔 쌍홍문 장군바위 용굴 등이 갖가지 전설을 간직한 채 흩어져 있다. 이 가운데에 좌선대와 그 아래 삼사기단은 원효・의상・윤필 세 사람이 함께 수도했던 곳이고, 「이태조 기단」은 이성계가 왕조창업의 뜻을 이루고자 기도하던 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보리암 바로 아래쪽 산길에 있는 쌍홍문은 거대한 해골의 두 눈처럼 생긴 절묘한 석문으로써 석가세존이 금산에서 돌배를 타고 나갈 때 이 문의 오른쪽에서 멀리 앞바다의 세존도 한 복판을 뚫고 나갔다는 곳이다. 굴 안에서 내다보는 전망이 일품인 쌍홍문은 상주 쪽에서 금산을 오르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으로써 정상의 문장암에 새겨진 「由虹門 上錦山」의 虹門(홍문)은 이곳을 두고 한 말이다.
△상주 쪽에서 금산을 오르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쌍홍문
가천마을의 다랑논들과 암수미륵
200km가 넘는 남해도의 해안은 가는 곳마다 남해다운 풍광을 두루 갖추고 있는데, 이동면 앵강곡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남면의 아래쪽 해안 길을 따라가면 월포해수욕장, 가천마을 암수바위, 사촌해수욕장, 임진성 등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이 가운데 가천마을은 남해도에서도 그 풍광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으로서 산비탈을 일구어 만든 다랑논과 남녀의 성기 모양을 한 ‘암수미륵’과 ‘밥무덤’으로 유명한 곳이다.
△척박한 땅, 억척스런 삶의 상징인 가천마을의 다랑이논
가천마을 주변에는 촘촘하게 일구어 놓은 손바닥만한 논밭들이 바다로 곧장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까지 이어져 있는데, 거기에는 여수의 인분을 거두어다 논밭을 가꾸었다는 ‘남해똥배’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 고장에는 여수 시내에 똥을 거두러 다녔던 똥배가 적지 않았다. 산의 경사가 심하고 평지가 좁은 남해섬의 척박한 환경에서 남해사람들은 농사에 쓸 거름을 얻으려고 더럽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쏟아져 내릴 듯한 해안의 산비탈에 석축을 쌓아가며 줄줄이 만들어 놓은 다랑이논들을 보고 있노라면 남해 사람들의 억척스런 삶에 외경심마저 느끼게 된다.
△ 가천마을 당산의 수미륵
또 하나 가천마을에서 유명한 것이 남녀 성기 모양을 한 암수미륵이다. 이들 암수미륵은 마을 안쪽의 미륵당산에 있는데, 이들 미륵에게 치성을 드리면 천재지변을 막을 수 있고, 자식 없는 사람이 공을 들이면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며, 마을 처녀와 총각들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 있다고 믿어오던 이 마을 사람들이 당산에 모시고 수호신으로 섬겨오던 성석(性石) 신앙물이다. 높이 5.8m 둘레 2.5m 쯤 되는 수미륵은 돌칼의 손잡이처럼 중간에 도드라진 선이 있어 발기한 남자의 성기처럼 서있고, 암미륵은 아랫배가 불룩한 임산부의 몸뚱이를 닮은 바위로서 높이가 3.9m 둘레 2.3m 쯤 되는데 머리 쪽에 흰색 한지를 두르고 축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있다.
그런가 하면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15일 밤이면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혼령들에게 밥을 주며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오고 있다. 이 동제는 마을 한가운데 길가에 높이 1.5m 정도의 3층 제단 모양으로 세워져 있는 ‘밥무덤’ 앞에서 지내는데, 이때 사람들은 제단 맨 위에 덮어놓은 돌 밑에 젯밥을 묻는다고 한다.
남해 최고의 상주해수욕장과 미조항
또한 상주면에는 남해안 제일을 자랑하는 상주해수욕장과 서포 김만중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쓰고 3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생을 마친 노도가 있고, 그 오른쪽 미조면에는 송정해수욕장과 남해 수산의 전진기지인 아름다운 항구 미조항이 있다.
△남해안 제일을 자랑하는 상주해수욕장 전경
이들 가운데 상주해수욕장은 금산에서 뻗어내린 산세가 두 팔을 둥그렇게 모아 바다를 껴안고 있는 모양을 한 천혜의 해수욕장으로서 금산과 함께 남해도를 대표하는 경승지로 꼽힌다. 2km에 이르는 해안선엔 수십 년 묵은 소나무 숲이 둘러쳐져 있고, 반달 모양의 백사장 모래는 모두가 조개껍질이 부서져 생긴 것들이어서 부드럽기 한이 없다. 게다가 이 해수욕장은 호수처럼 물결이 잔잔하고 수온이 높기로 유명한데 그것은 바다를 향해 열린 좁다란 입구마저도 작은 섬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름철이면 특히 전국에서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이 많이 몰려든다.
△남해의 수산전진기지 미조항의 풍경
상주해수욕장에서 송정해수욕장을 지나 남해도 동남단에 있는 미조항은 특히 갯내 없는 부드러운 바람이 살을 간질이며 「미륵이 도왔다(彌助)」는 그 이름을 실감케 할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한 곳이다. 이 항구는 멸치와 삼치 갈치 등이 많이 잡히는 남해 수산업의 전진기지로서 그 뿌리가 상당히 깊은 곳이기도 하다. 미조항의 뒤쪽 팔랑마을 언덕에는 후박나무, 돈나무 등 희귀 아열대식물이 자생하는 천연기념물 제29호 상록수림이 우거져 있고,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방파제 끝에 외롭게 서있는 빨간 등대 하얀 등대와 함께 울긋불긋 깃발을 단 어선들이 물살을 가르며 오고가는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건리 방조어부림과 지족해협 죽방렴
미조항에서 아름다운 해안 길을 따라 가다보면 삼동면 물건리 바닷가에 방조어부림(防潮魚府林)이 있다. 물건리의 방조어부림은 남해섬에 많이 있는 해안 숲 가운데 가장 크고 울창하며 그 역사는 약 300년 전 쯤으로 알려져 있다.
△남해도의 대표적인 해안 숲 물건리 방조어부림
어촌 사람들이 파도와 바람을 막고 녹색을 좋아하는 고기들의 습성을 이용해 고기떼를 끌어들일 요량으로 나무를 심어 만들어졌다는 이 숲은 어촌 사람들의 고기잡이를 위한 작업장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각종 놀이를 즐기며 쉬는 공동 휴식공간이기도 한 곳이다. 매년 10월이면 마을사람들은 이 숲에서 풍어를 비는 동제를 지낸다. 현재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는 물건리 방조어부림에는 말채나무․가마귀밥여름나무․누리장나무․화살나무 등 좀처럼 보기 힘든 나무에, 비속․청미래덩굴․개머루 등이 이리저리 엉켜 있어 그 자체가 식물교육장이기도 하다.
△ 지족해협의 원시적 고기잡이 죽방렴
남해섬의 가장 두드러진 개성 중의 하나가 방조어부림이라면, 남해에서만 볼 수 있는 원시적인 고기잡이 방법의 하나가 죽방렴(竹防簾)이다. 죽방렴은 바다에 부채꼴 모양으로 나무말뚝을 박고 말뚝이 좁아지는 부분에 원통형의 대나무발을 쳐놓아 그 안에 들어온 고기들을 잡는 방법인데,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하루에 두 번씩 죽방렴 안에 든 고기를 거두어들인다고 한다.
이 죽방렴은 현재 창선대교가 놓여 있는 남해 본섬의 삼동면 지족리와 창선섬의 창선면 지족리 사이의 지족해협에 많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 지족해협의 바다는 빠른 물살이 지나는 좁은 물목으로 죽방렴 설치에 알맞은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고, 주로 멸치가 많이 잡히며, 꽁치 갈치 병어 보리새우 감성돔 등도 잡힌다고 하는데, 이렇게 순순히 잡힌 고기들은 다른 방법으로 잡은 고기들보다 맛이 있어 훨씬 비싼 값으로 팔려나간다고 한다.
이곳 지족해협의 청산대교를 지나면 길은 섬과 섬을 이어주는 늑도교와 초양대교, 삼천포대교를 거쳐 삼천포항으로 이어진다. 국내 최초로 섬과 섬을 이어주는 다리들로 된 이 길은 1995년에 착공하여 2003년에 완공되었는데, 총연장 3.4km로 그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이 길은 2006년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뽑힌 삼천포대교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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